Warning
‘미키 17’의 스포일러 있음
관람일: 2025.02.28
들어가는 글
이런 감상문을 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에겐 ‘감독의 의도, 담긴 메세지를 읽어내고 맞춰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물론 나는 영화를 잘 알지도 않고 메타포나 상징, 연출에 대한 지식도 없다. 그럼에도 기록을 남기는 목적이 으레 그렇듯, 잊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에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 와중에 움베르토 에코가 한 말을 알게 되었다.
Quote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 움베르토 에코
그런 의미로 조금 더 편하게, 내가 느낀 것을 중심으로 감상문을 써볼까 한다. 설령 그게 감독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짧게 정리
4점.
일반적인 봉준호 감성의 영화는 아니다.
후기
일단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가 좋았다. 박찬욱 감독이 왜 로버트 패틴슨에게 주연상과 조연상 모두 주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겠다.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기로는, 이 영화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바꿔 말하자면 ‘인간을 규정짓는 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른 게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주로 느낀 건 이쪽이었다.
우선 영화 속에서 ‘미키’를 ‘미키’로 보는 건 ‘나샤’ 밖에 없다.
‘마샬’은 ‘미키’를 ‘익스펜더블’로, 나아가서 ‘인간’으로도 보지 않는다. 그저 죽어도 다시 프린트되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으라고 데려온’ 소모품이다.
‘카이’는 ‘미키’에게 호감을 가지고는 있지만 ‘미키 17’과 ‘미키 18’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자 ‘나샤’에게 ‘미키’를 나눠갖자고 말한다. ‘미키 17’과 ‘미키 18’을 분리해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샤’는 ‘카이’의 말에 반발한다. 둘 다 ‘미키’니 그럴 순 없다고.
‘미키’를 규정짓는 건 번호도 아니고, ‘익스펜더블’이라는 그의 역할도 아니고, 그의 성격도 아니고, 심지어 그가 가진 상처 (어릴 때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일) 도 아니다. 그저 그라는 인간 그 자체다.
어떤 모습이든 간에 ‘나샤’에게 ‘미키’는 ‘미키 반스’다.
‘미키’가 가진 상처도 그를 규정짓는 게 아니라는 부분에 대해 조금 더 말해보자면, 이는 그 일에 대한 ‘미키 17’과 ‘미키 18’의 태도 차이에서 드러난다.
‘미키 17’은 자신이 어릴 때 조수석에 앉아 버튼을 누른 것이 엄마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처한 고통이 그 일로 인한 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들은 ‘미키 18’은 그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며 버튼을 누른 건 엄마의 죽음과 상관 없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 어떤 ‘미키’든 그는 ‘미키 반스’다.
그러나 ‘미키 17’은 버튼을 누른 일을 두고 두고 후회하고 있는 반면 ‘미키 18’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미키’가 가진 상처가 ‘미키’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든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이라면’이라는 조건이 중요한 포인트인데, 이걸 보여주는 게 영화 후반부에 ‘미키 18’이 ‘마샬’과 함께 자폭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미키 18’은 마마 크리퍼에게 “인간 하나”라고 외친다.
죽은 건 둘, ‘마샬’과 ‘미키 18’. 대사는 “인간 하나”.
그러니까 둘 중 하나는 인간이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마샬’이 너무 명백한 ‘악’이긴 하다.)